아아아아아.
2박 3일만에 돌아온 방에는 냉장고 문이 빼꼼하고 열려 있었다. 크지도 않은 작은 냉장고 안이 얼음과 성에로 뒤덮였다. 분명이 태반이 상했을텐데 그거 확인할 기력도 없어서 아이스팩만 빼꼼히 (얼음과 성에에 뒤덮여 묻혀 있는데서 파서) 꺼내고 닫았다. 이 현실은 좀만 있다가 대응해야겠다......
27일의 일기.
아침부터 서둘러 강변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남양주로 갔다. 차라리 강원도에서 오면 가까웠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교통이 편해서(?) 일산보다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매우 협조적이며 이해심 있는 피면담자께 친구분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였더니 불러주셔서 1:2 면담을 했다. 면담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려니 붙잡고 밥도 사주셨다. 밥 까지 얻어먹고 다시 허우적거리며 학교 근방으로 돌아오니 세미나 시간이 가까웠다. 세미나에 뒤풀이에.. 할증 붙은 택시로 집에 돌아왔다. 뒤풀이는 나름 소득이 있는 것이었다.
28일의 일기.
그렇게 돌아와서 배터리를 교체하여 보니 동아리 친구들 카톡방에 삼백여개의 카톡이 있었는데, 오전에 간단하게 농구하고 놀다 누군가의 취직턱으로 밥을 먹자고 하였다. 두 시에 면담을 잡았으니 밥은 못 먹겠지만 잠시 들러 얼굴이나 볼까 하고 얘기했다. 그렇게 잠들고 일어났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오전에 시간이 남으면 논문을 읽던 문헌을 검토하던 면담을 정리하던 준비하던 뭔가 생산적인 일을 했어야만 했었다. 노트북이 없어도, 피시방이라도 가야했었다. 놀고 싶은 마음에 간 농구코트에서 같이 농구를 하다가(=폐를 끼치다가)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혼자 톡, 하고 발목을 삐었다. 야, 나 선수교체해줘 못 움직일거 같아 라고 하니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다고 쉬러가자고 했다(=교체할 사람 같은거 없음). 그리고 가까운 친구 집에서 에어컨 쬐며 미쿡야구를 보는데, 나올 때 쯤에는 발이 부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놀란 마음에 가까운 정형외과에 가보니 X-ray를 찍고는 인대가 늘어난 것 같다며 발목보호대를 주고 가급적이면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 이거슨 나보고 필드를 하지 말라는 말인가. 절뚝거리며 이 핑계다 하며 택시를 타고 면담하러 갔다.
면담은, 학부 선배인 사람인데, 시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 굽신 조아림 송구 콤보로 약속을 잡아낸 것이었다. 시험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는 분은 다소 장황하게 얘기를 해주셨는데, 역시나 발목을 삐며 경황없음이 100 증가하고 이동성이 10 감소한 나는 녹음기를 킬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이건 내 주요 연구 대상이 아니었습니다'로 정신승리를 시전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면담을 마치고 (여전히 절뚝거리며) 지하철 2호선을 반 바퀴 정도 돌았다. 여기에서는 집회가 한창이었는데, 내가 있던 지역에서는 7명 정도가 올라왔다. 전경에 구경하는 사람에 집회 참가자에.. 바글거리는데서 어떻게 또 용케 사람들을 찾았다. 자리에 앉아서 간간히 투재앵~하는 추임새를 거들며 학부 다니는 내내 이런걸 도망다녔던 생각을 했다. 물대포는 우리가 자리를 뜬 이후에 쏘아졌다고 했다. 거친 발성과 말투로 선언을 외치는 각계의 대표들을 보며(그 중에는 우리쪽 사람도 있었는데, 이전에 뵜던 자리에서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말투와 목소리를 기억하며, 집회의 말하기 방식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따라 다녔어도 좋은 필드였을텐데 하고 생각도 하긴 했다. 예전에 학부 과제로 모 청년 단체 관련 필드를 하면서 운동의 방식이 투재앵~에서 유쾌하고 밝은 분위기로 변화하는 것 같다 하고 소결을 내린 적이 있는데,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곳도 그러한 새로운 방식의 운동 중 하나라고 생각은 하는데, (이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무겁고 '남성적이고' 거친 방식의 운동이 아직도 여전히 있고, 표현 방식이 다양해진(혹은 영리해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갈 길이 먼 지방 사람들은 길을 재촉[?]해서 여섯시쯤 빠져나와서 이래저래 차와 차를 갈아타고 밥을 먹고 하다보니 열시 좀 넘어 집에 들어왔다. 일기를 쓰고 나니 도저히 필드노트를 쓸 멘탈이 아닌 것을, 아아아. 냉장고와 발목이 정신을 갉아먹는다.